100만 건의 다운로드를 이끈 '기능 없음'의 역설
일주일 만에 100만 건이 넘는 설치 파일 다운로드가 발생했다. 리눅스 배포판 저장소를 통한 업데이트 수치를 제외하고도 거둔 성적이다. 지난 8월 26일 출시된 리브레오피스(LibreOffice) 26.8 버전이 기록한 수치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무료 대안으로 20년 가까이 운영되어 온 이 소프트웨어에게 이번 업데이트는 역대 가장 인기 있는 버전으로 기록됐다.
단순한 타이포그래피나 글쓰기 시스템의 개선이 이 정도의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시장이 반응한 지점은 오히려 '무엇이 없는가'에 있었다. 리브레오피스를 관리하는 더 도큐먼트 파운데이션(TDF, The Document Foundation)은 이번 버전에서 생성형 AI 기능을 넣지 않았음을 명확히 했다. TDF는 "이제 AI가 없다는 것이 하나의 기능(Yes, no AI is now a feature)"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통해 이러한 입장을 공식화했다.
TDF가 AI 도입을 유보한 근거는 기술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아니라 프라이버시와 원칙의 문제다. TDF는 AI 기술이 기본 탑재되기 위해 충족해야 할 엄격한 원칙 목록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데이터 소유권의 명확성, 투명한 작동 방식, 그리고 사용자의 프라이버시 보호가 포함된다. 현재의 생성형 AI 기술은 이러한 기준을 충분히 만족하지 못한다는 판단이다. 다만, AI 기능을 원하는 사용자를 위해 커뮤니티 플러그인을 통한 개별 통합 방식은 권장하고 있다.
AI 내장 소프트웨어 시장의 틈새와 경쟁 구도
구독 모델 기반의 경쟁사들이 AI 비서를 전면에 내세우는 흐름과 리브레오피스의 행보는 정반대 지점에 있다. TDF는 AI 어시스턴트의 도입이 결국 가격 인상의 명분이 되고, 모든 문서를 특정 기업의 인프라 내에 묶어두려는 '락인(Lock-in)' 전략을 강화한다고 분석한다. 즉, AI 기능의 추가가 사용자 편의성 증대라는 명분 뒤에 수익 모델 강화라는 기업의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다는 시각이다.
이러한 관점은 현재 AI가 모든 소프트웨어의 기본 사양(Baked-in)이 되어가는 시장 흐름에서 'AI-프리(AI-free)'라는 선택지가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준다. 모든 도구가 AI를 탑재할 때, 오히려 AI가 없는 환경을 보장하는 것이 차별화된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수치로 증명된 셈이다. 이는 특히 데이터 유출에 민감한 NGO, 정부 기관, 보안 중심의 기업 환경에서 리브레오피스의 채택 가능성을 높이는 요소로 작용한다.
결국 이번 사건은 시장 참여자들에게 새로운 선택지를 제시한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AI의 도움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데이터 주권과 프라이버시를 위해 AI가 배제된 깨끗한 환경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다. 리브레오피스는 후자를 선택한 사용자층이 생각보다 두텁다는 점을 확인하며, AI 만능주의 시장 속에서 독자적인 생존 영역을 확보했다.
한국 AI 실무자와 기업이 관찰해야 할 지점
데이터 보안이 최우선인 환경에서 소프트웨어를 도입해야 하는 한국의 기업이나 공공기관 실무자라면, 이번 사례를 통해 '기능의 풍부함'보다 '제어권의 범위'를 검토하는 기준을 세울 수 있다. AI 기능이 기본 탑재된 툴을 사용할 때 발생하는 데이터 학습 리스크와 비용 상승 압박을 피하고 싶다면, 리브레오피스처럼 핵심 기능은 유지하되 AI는 플러그인 형태로 선택적 도입이 가능한 구조가 대안이 될 수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TDF가 제시한 'AI 도입 원칙'이다. 데이터 소유권과 투명성이 보장되지 않은 AI는 기본 기능으로 포함될 수 없다는 기준은, 향후 기업 내부의 AI 도입 가이드라인을 설정할 때 유용한 체크리스트가 된다. 무조건적인 AI 채택보다는, 어떤 원칙이 충족되었을 때 AI를 업무 프로세스에 편입시킬 것인지에 대한 내부 기준을 먼저 수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앞으로 관찰해야 할 신호는 AI-프리 소프트웨어에 대한 수요가 일시적인 반작용인지, 아니면 데이터 주권 강화라는 거대한 흐름의 일부인지 여부다. 만약 보안 요구사항이 높은 산업군을 중심으로 이러한 채택 흐름이 이어진다면, AI 기능을 '넣는 것'만큼이나 '어떻게 안전하게 뺄 수 있는가' 혹은 '어떻게 선택적으로 제어하게 하는가'가 소프트웨어 경쟁력의 핵심 지표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