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기반 성과 측정과 간호 현장의 충돌
콜센터 간호사가 환자와의 통화 시간을 15분 넘게 유지하면 관리자의 비판을 받거나 성과 평가 면담 대상이 된다. 미국 캘리포니아 최대 민간 고용주인 카이저 퍼머넌트(Kaiser Permanente)가 도입한 성과 관리 방식이다. 간호사들은 매달 받는 성과 점수에 통화 시간이 직접적으로 반영되며, 소프트웨어가 매일 생산성 저하 여부나 응답 속도를 예측해 관리자에게 보고한다고 밝혔다.
단순한 시간 측정을 넘어 AI를 활용한 정성적 평가도 시도됐다. 카이저 퍼머넌트는 2024년 여름부터 간호사와 환자의 음성에서 공감도와 톤을 분석하는 AI 도구를 테스트했다. 해당 테스트는 2024년 11월에 종료됐으나, 노동조합 측은 사측이 언제든 이 프로그램을 다시 도입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현재 캘리포니아 간호사 협회(CNA)는 콜센터 인력 1,000명을 포함해 총 25,000명의 간호사를 대변해 AI 관련 쟁점을 포함한 새로운 계약 협상을 진행 중이다.
사측은 AI를 환자 안전을 위해 책임감 있게 사용하고 있으며, '평균 처리 시간(Average Handle Time)'을 성과 평가의 절대적 기준으로 쓰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하지만 현장 간호사들은 자살 충동을 느끼는 환자와 한 시간 넘게 통화하거나, 말기 암 진단을 받은 환자를 위로하는 등 전문적 판단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AI의 스크립트와 시간 제한 때문에 심리적 압박을 느낀다고 증언한다.
'알고리즘 경영'의 확산과 규제 움직임
이번 갈등은 AI가 임상 보조를 넘어 인력 관리의 도구로 쓰이는 '알고리즘 경영'의 흐름 속에 있다. 카이저 퍼머넌트는 이미 Preventus(퇴원 시점 결정 AI)나 Abridge(진료 내용 텍스트 변환 AI) 같은 도구를 도입해 운영 효율을 높여왔다. 문제는 이러한 효율성 중심의 AI 채택이 의료 서비스의 핵심인 '인간적 접촉'과 충돌하면서 발생한다.
이러한 흐름에 대응해 캘리포니아 주 의회는 AI 기반 직장 감시를 규제하는 법안들을 검토하고 있다. 특히 SB 947(상원 법안 947)을 비롯해 고용주가 AI로 직원의 정서 상태를 예측하는 것을 금지하거나, 의료진이 AI의 자동화된 권고를 무시하고 전문적 판단을 내렸을 때 보복 조치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법안이 논의 중이다.
시장 참여자들은 AI 도입이 단순한 비용 절감을 넘어 노동자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직무 소진(Burnout)을 가속화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2023년 4개국 콜센터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AI 관리 도구를 사용하는 환경의 노동자들은 통화 사이의 휴식 시간이 줄어들고 정서적 고갈을 느낄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AI 도입 시 고려해야 할 '인간적 판단'의 비용
한국의 AI 실무자와 기업들은 이번 사례를 통해 AI 성능 지표와 실제 업무 성과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의료나 상담처럼 상황의 맥락과 정서적 교감이 중요한 영역에서 '평균 처리 시간'이나 '표준 스크립트 준수율' 같은 정량적 지표를 AI로 강제할 때, 오히려 서비스의 질이 하락하는 역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특히 AI가 내린 평가가 현장 전문가의 판단과 충돌할 때, 누구에게 우선권을 줄 것인가에 대한 거버넌스 설계가 필수적이다. 카이저 퍼머넌트의 사례처럼 AI 평가 결과가 인사 고과와 직결될 경우, 작업자는 AI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생략하는 '체크박스 채우기'식 업무 패턴으로 변할 위험이 크다.
결국 AI 도입의 성패는 기술적 정확도가 아니라, AI가 대체할 수 없는 '전문가적 재량'의 영역을 얼마나 인정하고 보호하느냐에 달려 있다. AI를 통한 효율화가 단기적인 비용 절감에는 기여할 수 있으나, 숙련된 인력의 이탈과 서비스 품질 저하라는 장기적 비용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