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웨어 설계 능력을 측정하는 EEBench V1의 등장
이번에 공개된 EEBench V1은 AI가 단순히 회로도를 그리는 수준을 넘어, 실제 작동 가능한 전자 회로를 설계할 수 있는지 측정하는 벤치마크다. 기존의 AI 회로 설계 시연이 주로 KiCad 같은 그래픽 기반 CAD 도구에서 마우스 클릭을 흉내 내는 '컴퓨터 사용 능력'에 치중했다면, EEBench는 선언적 코드 기반의 atopile(회로 설계 언어)을 사용한다. 이를 통해 AI 에이전트가 좌표나 메뉴 설정 같은 GUI 작업에 시간을 쓰는 대신, 부품의 연결과 전기적 제약 조건이라는 본질적인 설계 작업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평가 방식은 매우 엄격하다. 예를 들어 주거용 에너지 미터 설계 과제에서는 전원 공급이 끊긴 후에도 프로세서가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도록 20ms 동안 3.0V 이상의 전압을 유지하는 능력을 측정한다. 단순히 '커패시터를 추가하라'는 정답을 맞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제조사 데이터시트에서 추출한 부품 사양을 적용해 SPICE(회로 시뮬레이션 프로그램) 모델로 검증한다. 전압에 따른 정전용량 변화, 부품 오차, 패키지 크기, 비용 등의 제약 조건을 모두 고려해 최적의 조합을 찾아내야 점수를 얻는다.
9월 1일 발표된 초기 결과에 따르면 앤스로픽의 클로드 오퍼스 5(Claude Opus 5)가 13개 과제에서 61.6%의 정답률을 기록하며 1위를 차지했다. xAI의 그록 4.6(Grok 4.6)이 57.1%로 2위, 클로드 페이블 5.1(Claude Fable 5.1)이 56.4%로 그 뒤를 이었다. 반면 오픈AI의 모델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성적을 보였다. GPT-5.5는 42.3%, GPT-5.6 솔(Sol)은 39.4%를 기록했다. 최근 오픈AI가 GPT-6 아스트라(Astra)의 KiCad 시연을 공개했지만, EEBench 기준의 정밀 설계 능력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다.
'엔지니어링 가속'을 향한 프런티어 랩의 경쟁 흐름
이번 벤치마크의 등장이 중요한 이유는 글로벌 AI 랩들이 전자 공학 능력을 모델의 핵심 경쟁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특히 xAI는 그록 4.6의 모델 카드 내 '엔지니어링 가속(engineering acceleration)' 섹션에 EEBench 결과를 공식 포함했다. 3D 모델링이나 파라메트릭 CAD 평가와 함께 회로 설계 능력을 명시한 것은, AI 모델의 성능 지표를 일반적인 언어 능력을 넘어 전문 엔지니어링 영역으로 확장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학습 데이터의 성격도 구체화되고 있다. xAI는 그록 4.6이 CAD를 포함한 도메인 특화 환경에서 고품질 엔지니어링 데이터와 강화학습(RL) 훈련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러한 흐름은 곧 출시될 그록 4.7에서 더 가속화될 전망이다. 일론 머스크는 스페이스X(SpaceX)의 방대한 데이터를 추가 학습시켜 엔지니어링 성능을 극대화한 모델을 내놓겠다고 예고했다. 이는 범용 AI 모델이 특정 산업의 전문 데이터를 흡수해 실제 하드웨어 설계 프로세스에 직접 개입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채택의 관점에서 보면, AI가 제시한 설계안을 시뮬레이션으로 즉시 검증하고 그 실패 결과(전압 미달, 과도한 비용 등)를 다시 보상 신호로 사용하는 RL 루프가 가능해졌다. 이는 AI가 '그럴듯해 보이는 회로도'를 그리는 단계에서 벗어나, 물리적 제약과 비용 효율성을 계산하는 '실제 엔지니어링' 단계로 진입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 AI 실무자와 개발자가 주목해야 할 지점
하드웨어 설계 자동화를 검토하는 실무자라면 이제 AI의 능력을 'GUI 조작'이 아닌 '시뮬레이션 기반 검증'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 텍스트로 된 데이터시트를 읽고 부품을 추천하는 수준을 넘어, SPICE 시뮬레이션을 통해 톨러런스 코너(Worst-case tolerance corner, 부품 오차의 최악 조건)에서도 동작하는지 검증하는 루프를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다.
특히 atopile과 같은 선언적 코드 방식의 도입은 AI 에이전트의 설계 성공률을 높이는 실질적인 방법론이 된다. 좌표 기반의 CAD 툴을 제어하게 하는 것보다, 전기적 제약 조건을 코드로 정의하고 이를 시뮬레이션 결과와 연결하는 구조가 AI에게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개발자는 AI가 제안한 설계의 '정확성'뿐만 아니라, 실제 주문 가능한 부품인지와 비용 효율성이 확보되었는지를 체크하는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향후 관찰해야 할 신호는 그록 4.7과 같은 '엔지니어링 특화 모델'이 실제 산업 현장의 복잡한 아날로그 필터 설계나 전원 회로 최적화에서 어느 정도의 신뢰도를 보이는가 하는 점이다. 현재의 60%대 정답률은 보조 도구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지만, 의료기기나 항공우주 부품처럼 무결성이 필요한 영역에서는 여전히 인간 엔지니어의 최종 검증이 필수적이다. 다만, 설계-시뮬레이션-수정으로 이어지는 반복 주기가 AI에 의해 획기적으로 단축되는 지점은 이미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