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V의 투자 원칙 'Don't Automate, Obliterate'

Fred Wilson(USV)은 2015년 마이클 해머(Michael Hammer)의 1990년 HBR 기사 제목을 인용한 'Don't Automate, Obliterate(자동화하지 말고, 완전히 없애버려라)' 원칙을 통해 스타트업 투자 관점을 정의했다. USV는 기존 시장의 절차를 소프트웨어로 자동화하는 기업보다 시장 구조와 운영 방식을 완전히 대체하는 기업을 더 큰 투자 기회로 평가한다. 이 원칙은 단순한 효율 개선을 넘어 시장의 전면적 개편 여부를 판단하는 USV의 핵심 기준으로 작동하며, 기존 시스템의 부분적 개선보다 구조적 대체에 우선순위를 둔다. 이는 단순히 기존의 업무 흐름을 빠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 자체가 필요 없는 새로운 구조를 설계하는 기업에 집중한다는 의미다.

실제 USV의 포트폴리오 기업들은 기존 시장의 참여자와 권력 관계를 바꾸는 전략을 취했다. 듀오링고(Duolingo)는 기존 교육 기관을 거치지 않는 직접 학습 모델을 확장해 교육 시장의 구조를 바꿨다. 코인베이스(Coinbase)는 프로그래밍 가능한 화폐를 제공해 기존 금융 중개 구조를 대체했다. 트위터(Twitter)는 출판사를 거치지 않는 직접 출판을 가능하게 하여 미디어 권력 관계를 재편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시장 내부에서 비용을 줄이는 자동화가 아니라, 시장을 구성하는 참여자 간의 권력 배분을 근본적으로 변경했다는 점이다.

AI 에이전트를 통한 전문성 패키징과 권력 이전

AI는 전문 지식의 공급 비용과 접근 장벽을 낮춰 전문가, 기업, 기관이 독점하던 권한을 수요자에게 이전한다. 과거 인터넷이 유통 비용을 낮춰 유통을 통제하던 미디어 기업의 시장 지배력을 약화시켰다면, AI는 전문성(Expertise)의 패키징을 통해 지식 시장의 중개 구조를 우회한다. 사용자는 이제 중개자에게 전문성을 빌리는 구조에서 벗어나, AI 에이전트를 통해 전문가 수준의 지능에 직접 접근하고 이를 실제 업무에 배치한다. 이러한 변화는 전문성을 독점하거나 접근을 통제해 권한을 유지하던 기존 주체들의 영향력을 실질적으로 감소시킨다.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의 이동은 시장 구조를 재편하는 핵심 동력이 된다. 사용자가 필요한 지능을 직접 호출하고 배치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기존의 중개자가 수행하던 '전문성 연결' 및 '승인' 단계의 가치가 하락한다. AI는 소비자와 기업 시장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기존 사업 모델과 시장 규칙을 새로 설정할 가능성을 가진다. 결과적으로 AI 시대의 핵심 기회는 전문성과 실행 능력을 통제하던 중개자의 권력을 고객에게 이전하는 구조적 설계에서 발생한다.

구조적 대체를 실행하는 AI 서비스 사례와 판단 기준

독트로닉(Doctronic)은 스마트폰 사용자에게 AI 의사를 직접 제공해 대기 명단과 의뢰 절차라는 기존 의료 접근 구조를 우회한다. 이는 환자 포털이나 예약 앱으로 접근 과정을 원활하게 만드는 '자동화'가 아니라, 의료 전문성을 개인의 주머니 안으로 옮겨 구조를 '없애는' 시도다. 특히 미국 유타(Utah)주에서는 AI 의사가 합법적으로 처방전을 작성할 수 있는 형태로 서비스를 시작해 의료 전달 과정의 중개 구조를 직접적으로 대체했다.

이셈바드(Isembard)는 고정밀 제조 라인 운영 전문성을 AI에 패키징해 공장 자체를 처음부터 다시 구축한다. 기존 업체에 소프트웨어를 판매해 견적 산출과 CNC 작업 흐름을 디지털화하는 자동화 방식 대신, 전문성 자체를 소프트웨어로 이전해 제조 역량이 해외 시설이나 노후 업체에 묶여 있던 구조를 해결한다. 이는 기존 공장에 도구를 추가하는 수준을 넘어, AI가 보유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생산 시설의 운영 방식 자체를 재구성하는 모델이다.

코파운더(Cofounder)는 제품 개발, 영업, 마케팅, 유통을 지원하는 개별 도구를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 고객을 대신해 사업 전체를 출시하고 운영하는 주체의 역할을 맡는다. 창업자에게 코파일럿 도구를 판매해 업무 속도를 높이는 자동화 단계에 머물지 않고, 사업 운영의 전 과정을 AI가 직접 실행함으로써 전문 인력 고용 비용과 부족 문제를 해결한다. 이는 개별 업무의 효율화를 넘어 사업 운영 주체라는 역할 자체를 AI가 대체하는 방식이다.

서비스 기획 시 사업 모델의 성격을 구분하는 [자동화 vs 없애기] 판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기존 중개자의 예약·의뢰·승인 절차를 개선하는가'라면 자동화이며, '그 절차 자체를 우회해 지능에 직접 접근하게 하는가'라면 없애기(Obliterate)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