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고객 데이터가 쌓여 있는 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고객 관계 관리) 데이터베이스를 소유하는 것이 GTM(Go-To-Market, 시장 진출 전략) 소프트웨어의 절대적인 승리 공식이었다. 지금은 그 데이터를 읽고 써서 실제 업무를 수행하는 AI 추론 레이어, 즉 '시스템 오브 인텔리전스'가 가치의 중심이 되고 있다. 달라진 건 AI 에이전트가 단순한 기록 도구를 넘어 리서치, 코칭, 자동 기록까지 담당하는 오케스트레이션 레이어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지난 30년간 Salesforce(약 1,400억 달러)와 HubSpot(약 90억 달러) 같은 기업들이 시장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모든 통화 메모와 거래 이력이 쌓이는 데이터베이스를 쥐고 있었기에, 사용자는 데이터 이전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치러야 하는 사실상의 '인질'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AI 에이전트가 CRM, 캘린더, Slack, 빌링 시스템 등 수십 개의 신호를 동시에 풀링하고 합성하기 시작했다. 이제 CRM은 유일한 진실의 원천이 아니라, AI가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참고하는 여러 입력값 중 하나로 변모하고 있다. 기존의 CRM UI가 한때 핵심이었던 페이스북 프로필처럼 점차 부차적인 '레거시 가구'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Salesforce 1,400억 달러와 HubSpot 90억 달러의 데이터 패권 변화

지난 30년간 수천 개의 영업 지원 소프트웨어 기업이 등장했지만, 시장의 가치는 결국 세일즈포스(Salesforce)와 허브스팟(HubSpot)이라는 두 거점에 집중됐다. 세일즈포스의 기업 가치는 약 1,400억 달러, 허브스팟은 약 90억 달러에 달한다. 이들이 압도적인 지배력을 가진 이유는 단순하다. 고객의 모든 통화 메모, 가격 협상 이력, 연락처 같은 핵심 데이터베이스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데이터가 쌓일수록 다른 서비스로 옮기기 어려운 이탈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구조다. 수년간의 운영 맥락이 축적된 시스템은 단순한 도구를 넘어 기업의 기억 장치가 되며, 사용자는 사실상 데이터에 묶인 인질 상태가 된다.

그동안 GTM(Go-To-Market, 시장 진출 전략) 분야에서 소프트웨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작았다. 전체 GTM 지출 중 소프트웨어 비용으로 할당되는 금액은 겨우 5%에서 10% 수준이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인건비로 지출됐다. 소프트웨어가 업무를 보조하는 보조 도구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AI 도구가 도입되면서 이 역학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점은 AI가 도입된 이후 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고객 관계 관리)의 데이터 입력량과 사용량이 오히려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사람이 직접 입력해야 했던 번거로운 작업들이 AI 에이전트를 통해 자동화되면서, 데이터베이스가 이전보다 훨씬 풍부하고 정교하게 채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가치의 중심은 데이터를 단순히 저장하는 기록 시스템에서 데이터를 읽고 쓰고 사고하는 지능 시스템으로 이동하고 있다. 비유하자면 과거의 CRM이 모든 정보가 적힌 거대한 도서관이었다면, 이제는 그 도서관의 책을 읽고 최적의 답을 찾아 실행하는 유능한 사서의 역할이 더 중요해진 셈이다. 데이터베이스 자체는 사라지지 않지만, 그 위에 올라타 업무를 오케스트레이션(Orchestration, 여러 요소를 조화롭게 배치하고 제어하는 것)하는 레이어가 새로운 권력의 중심이 된다. 세일즈포스와 허브스팟이 최근 API-first(API를 최우선으로 설계하여 외부 연결성을 극대화하는 방식) AI 오퍼링을 빠르게 출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 응용 프로그램 인터페이스)는 서로 다른 소프트웨어가 대화할 수 있게 돕는 통로다. 기존에는 사용자가 화면을 통해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했다면, 이제는 AI 에이전트가 이 통로를 통해 데이터를 빠르게 가져가고 다시 기록한다. 결국 데이터베이스 소유권이라는 전통적인 패권에서 벗어나, AI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데이터를 활용해 실제 액션을 만들어내느냐는 추론 레이어의 경쟁으로 판이 바뀌고 있다. 두 기업은 여전히 거대한 데이터셋을 보유하고 있지만, 이제는 그 데이터를 AI가 가장 잘 소비할 수 있는 형태로 제공하는 인프라 역할로 스스로를 재정의하며 가치 이동에 대응하는 중이다.

친구 그래프에서 뉴스피드로: SoR과 SoI의 구조적 차이

페이스북의 핵심 자산은 오랫동안 친구 그래프(Friend Graph, 사용자 간의 관계망)였다. 하지만 뉴스피드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친구 그래프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가치의 중심은 이제 어떤 콘텐츠를 보여줄지 결정하는 피드 알고리즘으로 이동했다. 프로필이나 좋아요 같은 데이터는 이제 내부 API(응용 프로그램 인터페이스)를 통해 소비되는 재료가 되었고, 사용자가 실제로 머무는 곳은 뉴스피드라는 지능형 레이어가 되었다.

기업용 소프트웨어의 세계에서도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승자는 SoR(System of Record, 기록 시스템)을 소유한 기업들이었다. 쉽게 말하면 데이터를 차곡차곡 쌓아두는 거대한 디지털 보관함 같은 역할이다. 세일즈포스나 허브스팟 같은 CRM(고객 관계 관리 시스템)이 강력했던 이유는 모든 통화 메모와 거래 이력이 이곳에 저장되어 다른 도구로 옮기기 어렵게 만드는 이탈 비용을 생성했기 때문이다. 수년간의 운영 컨텍스트가 축적되면 사용자는 사실상 고객이 아닌 인질 상태가 되어 시스템을 떠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소프트웨어의 중력은 SoI(System of Intelligence, 지능 시스템)로 옮겨가고 있다. SoI는 단순히 데이터를 보관하는 것을 넘어,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추론하고 실행하는 지능형 레이어다. 비유하자면 기록 시스템이 도서관이라면, 지능 시스템은 그 책들을 모두 읽고 정답을 알려주는 전문 사서와 같다. 실제로 영업 담당자의 일상은 이미 바뀌고 있다. 미팅 전에는 리서치 에이전트가 10-K(미국 상장사가 제출하는 연례 보고서)와 실적 발표 내용을 분석해 브리핑을 제공한다. 통화 중에는 코칭 다이얼러(전화 연결 시스템)가 상대방의 반응에 맞춰 실시간으로 반론 대응 가이드를 띄워준다.

여기에 오케스트레이션 레이어(여러 시스템을 조율해 하나의 흐름으로 만드는 계층)가 더해지면 완성된다. 이 레이어는 통화 녹음을 듣고 핵심 내용을 추출해 CRM의 적절한 필드에 자동으로 기록한다. 개별 기능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들이 결합한 형태가 바로 기업용 소프트웨어의 뉴스피드 역할을 한다. 이제 사용자는 데이터를 입력하기 위해 CRM 화면을 열지 않는다. 대신 AI가 분석하고 제안하는 지능형 인터페이스에서 업무를 처리한다. 결국 전환 비용의 기준은 데이터의 위치가 아니라, 내 업무 흐름과 제도적 컨텍스트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 지능 레이어의 성능으로 이동하게 된다.

인건비 예산을 흡수하는 AI 네이티브 GTM 스택의 확장성

영업 부사장이 아침에 노트북을 열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화면이 바뀐다. 예전에는 세일즈포스 같은 CRM(고객 관계 관리 시스템)에서 정적인 계정 목록을 일일이 훑으며 오늘 누구에게 연락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이제는 AI가 생성한 우선순위 피드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밤사이 어떤 잠재 고객이 시장에 진입했는지, 어떤 파이프라인 딜이 조사가 필요한 방식으로 조용해졌는지 AI가 먼저 짚어주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의사결정에 들어가는 막대한 인지적 에너지를 AI가 대신 소모해 주는 구조다. 이는 GTM(Go-To-Market, 제품을 시장에 출시하고 고객을 확보하는 전략 및 실행 과정) 지출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과거에는 전체 GTM 예산 중 소프트웨어 비중이 5~10%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인건비였으나, AI는 단순한 인력 감축을 넘어 업무 효율을 극대화함으로써 GTM 지출 대비 수익률을 높이고 소프트웨어 시장의 전체 파이 자체를 키우고 있다.

현장에서 체감하는 가장 큰 변화는 정보의 평준화다. 입사 6주 차 신입 사원이 10년 차 베테랑보다 더 정교한 미팅 브리핑 자료를 가지고 회의에 들어가는 장면이 일상이 된다. AI 에이전트가 기업의 10-K(미국 상장사가 제출하는 연례 보고서)와 실적 발표 내용을 미리 분석해 핵심 요약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모든 팀원이 최고 수준의 리서치 전문가를 개인 비서로 둔 셈이다. 영업 부사장은 이제 CRM에 기록된 불완전한 텍스트에 의존하지 않고, AI가 분석한 통화 녹취와 이메일 스레드를 통해 팀의 실제 활동 패턴을 실시간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최근 등장하는 AI 네이티브 GTM 스타트업들은 거대한 통합 플랫폼을 지향하기보다 좁고 빈도가 높은 특정 워크플로우를 중심으로 클러스터링하고 있다. 입력값이 구조화되어 있고 출력값이 명확하게 측정 가능한 영역부터 파고들어 실질적인 성과를 증명하는 전략을 취한다.

더욱 주목할 점은 제도적 기억(Institutional Memory, 조직 내 구성원이 공유하는 암묵적 지식과 경험의 총합)의 자산화다. 보통 유능한 담당자가 이직하면 그가 쌓아온 고객과의 미묘한 관계나 과거의 맥락 같은 핵심 컨텍스트가 함께 사라지며 조직에 손실을 준다. 하지만 AI 레이어가 모든 통화 녹취와 이메일, 캘린더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하고 분석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담당자가 재직하는 동안 AI가 조용히 축적한 데이터는 퇴사 후 후임자에게 그대로 전달 가능한 디지털 자산으로 전환된다. 이는 과거에 사람이 머릿속에 담고 있던 경험치가 이제는 시스템의 소유권으로 이동함을 의미한다. 이런 방식으로 AI는 인건비 예산을 단순히 깎아내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이 떠나도 남는 조직의 지능을 구축함으로써 소프트웨어가 과금할 수 있는 가치 범위를 인적 서비스의 영역까지 확장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