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속 160km로 질주하는 유럽의 어느 도로 위. 라이더의 시야 앞에는 내비게이션 화살표가 도로 위에 그대로 그려진 듯 떠오르고, 속도와 안전 경고가 실시간으로 나타난다. 스마트폰을 확인하거나 대시보드를 내려다볼 필요 없이, 헬멧 속에 박힌 손톱만 한 렌즈 하나가 모든 정보를 전달한다.

이 장면은 단순한 컨셉 영상이 아니라, 올해부터 실제 도로에서 구현될 미래의 모습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안경 형태에 AI를 집어넣으려면 렌즈가 극도로 얇아야 하면서도 배터리를 적게 먹어야 하는데, 이것이 그동안 업계의 거대한 벽이었다. 이 장면 뒤에는 안경이라는 일상적인 폼팩터(제품의 외형)를 완성하기 위해 광학 모듈의 한계를 깨려는 한국 스타트업의 기술력이 숨어 있다.

레틴에이알(LetinAR), 4,170만 달러 투자 유치와 2027년 IPO 계획

Omdia(옴디아, 글로벌 시장조사기관)가 집계한 수치는 현재 AI 글래스 시장의 팽창 속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2025년 글로벌 AI 글래스 출하량은 전년 대비 300% 이상 급증한 870만 대에 달할 것으로 보이며, 올해는 이미 1,500만 대를 돌파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단순히 신기한 기기를 넘어 대중적인 웨어러블 기기로 진입하는 임계점에 도달한 셈이다. 이러한 시장의 폭발적 성장은 하드웨어의 핵심 부품을 만드는 기업들에게 거대한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이 흐름의 중심에 있는 한국 스타트업 레틴에이알(LetinAR, 광학 모듈 전문 기업)이 최근 대규모 자금을 확보하며 규모를 키우고 있다. 한국산업은행(KDB)과 롯데벤처스 등으로부터 1,850만 달러의 투자를 유치하며 성장 동력을 보탰다. 이로써 레틴에이알의 누적 투자 금액은 총 4,170만 달러에 이르게 됐다. 확보한 자금은 시장이 초기 수용자 단계를 지나 대량 생산 체제로 전환되는 시점에 맞춰 사업 규모를 확장하고 기술 고도화를 이루는 데 투입될 예정이다. 단순히 연구 개발에 그치지 않고 실제 양산 가능한 수준으로 공정을 최적화하여 글로벌 공급망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이다. 기업의 외형 성장을 가속화해 오는 2027년에는 한국 증시 상장(IPO, 기업공개)을 추진한다는 구체적인 로드맵도 세운 상태다.

투자자들의 관심은 단순히 자금 회수를 넘어 전략적 협력으로 이어진다. 특히 LG전자(LG Electronics, 한국의 가전 기업)는 레틴에이알에 투자한 초기 투자자일 뿐만 아니라, 현재 자체적으로 AI 스마트 글래스를 개발하며 시장 진입을 준비하고 있다. 이는 글로벌 가전 기업이 AI 글래스라는 카테고리를 얼마나 핵심적인 미래 먹거리로 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레틴에이알은 완제품 안경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안경이 작동하게 만드는 핵심 부품인 광학 모듈을 설계한다. 쉽게 말하면 안경 렌즈 속에 아주 작은 이미지 투사 장치를 넣어 사용자의 시야에 정보를 띄워주는 역할을 한다. 비유하자면 거실 전체를 밝히는 텔레비전 화면을 아주 작게 압축해 렌즈 속에 집어넣고, 그 빛이 흩어지지 않게 정확히 사용자의 눈으로만 쏘아주는 정밀한 통로를 만드는 작업과 같다.

PinTILT: 웨이브가이드와 버드배스의 한계를 넘는 광학 설계

스마트 글래스의 외형과 성능을 결정하는 핵심 변수는 빛을 어떻게 사용자의 눈으로 전달하느냐는 광학 설계 방식이다. 현재 업계가 직면한 가장 큰 난제는 렌즈의 두께를 얇게 유지하면서도 화면의 밝기를 높이고 배터리 소모를 획기적으로 낮추는 일이다. 하지만 기존의 광학 방식들은 어느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트레이드오프(Trade-off, 상충 관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장 대중적인 웨이브가이드(Waveguide, 빛을 렌즈 전체로 퍼뜨려 전달하는 방식)는 얇은 두께라는 장점이 있지만 효율이 낮다. 쉽게 말하면 거실의 TV가 빛을 온 방안에 무작위로 뿌리는 것과 비슷하다. 빛을 렌즈 전체 면적으로 넓게 퍼뜨려 이미지를 만들기 때문에 렌즈 자체는 매우 얇게 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사용자의 눈에 도달하는 빛의 양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나머지 대부분의 빛은 렌즈 밖으로 새어 나가 낭비된다. 결과적으로 화면을 밝게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투입해야 하며, 이는 곧 배터리가 빠르게 소모되는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반대로 빛 전달 효율에 집중한 버드배스(Birdbath, 거울을 이용해 빛을 반사시키는 방식)는 구조부터가 다르다. 비유하자면 거울을 이용해 빛의 경로를 정밀하게 굴절시켜 눈으로 직접 쏘아주는 방식이다. 빛의 손실이 적기 때문에 화면이 매우 밝고 전력 효율이 뛰어나다는 강점이 있다. 그러나 이 방식은 빛을 반사시키기 위한 거울 구조가 필수적이며, 이 광학계가 차지하는 물리적인 공간이 상당하다. 이 때문에 렌즈 뭉치가 두꺼워질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일반 안경처럼 자연스럽고 가벼운 폼팩터(Form factor, 제품의 외형적 규격)를 구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레티너(LetinAR)가 개발한 핀틸트(PinTILT, 렌즈 내부의 미세 광학 요소를 배열해 빛을 유도하는 기술)는 이러한 효율과 크기의 충돌을 정면으로 해결한다. 렌즈 내부에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아주 작은 미세 광학 요소들을 정밀하게 배열하여, 빛이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고 오직 사용자의 눈으로만 정확하게 흐르도록 유도하는 원리다. 낭비되는 빛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면서도 렌즈의 두께를 얇게 유지할 수 있는 설계를 적용했다. 이를 통해 기존 웨이브가이드보다 훨씬 밝은 이미지를 구현함과 동시에 전력 소모를 낮췄으며, 버드배스 방식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부피와 무게까지 줄여 일반 안경에 가까운 가벼운 착용감을 가능하게 했다.

NTT QONOQ부터 Aegis Rider까지, 글로벌 B2B 공급망 확장

일본의 NTT QONOQ Devices와 다이나북(Dynabook, 구 도시바 클라이언트 솔루션)의 제품에는 이미 레틴에이알의 모듈이 탑재되어 출고되고 있다. 단순히 기술력을 증명하는 프로토타입 단계를 넘어 실제 양산 체계를 경험하고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하드웨어 산업에서 설계도와 실제 제품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양산 경험은 일종의 거대한 진입 장벽으로 작용한다. 쉽게 말하면 연구실에서 하나를 완벽하게 만드는 것과 공장에서 수만 개를 동일한 품질로 찍어내는 수율을 맞추는 일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다. 레틴에이알은 글로벌 기업들과의 협업을 통해 이 까다로운 공정 최적화 과정을 직접 겪으며 부품 공급사로서의 신뢰도를 쌓았다. 이는 단순한 납품 실적을 넘어 글로벌 시장이 요구하는 엄격한 품질 기준과 제조 역량을 모두 갖췄음을 의미한다.

가장 도전적인 협력 사례는 스위스의 딥테크(Deeptech, 과학적 발견이나 공학적 혁신을 기반으로 한 기술 기업) 기업인 이지스 라이더(Aegis Rider)와의 파트너십이다. 이지스 라이더는 ETH 취리히 컴퓨터 비전 랩에서 스핀오프된 기업으로 AI 기반의 AR(Augmented Reality, 증강현실) 헬멧을 개발하고 있다. 오토바이 운전자가 시속 160km로 달리는 고속 주행 상황에서 내비게이션 화살표나 안전 경고가 헬멧 바이저 표면에 단순히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도로 바닥에 물리적으로 그려진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기술이다. 레틴에이알의 광학 모듈은 이 헬멧의 핵심 눈 역할을 수행하며 2026년 유럽 연합(EU)과 스위스 시장 출시를 목표로 준비 중이다. 진동이 심하고 외부 빛의 간섭이 큰 극한의 환경에서도 선명한 이미지를 투사해야 하는 이 프로젝트는 레틴에이알 기술의 실전 능력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포트폴리오가 된다.

시장의 판도는 웨이브옵틱스(WaveOptics)나 디지렌즈(DigiLens), 루무스(Lumus) 같은 글로벌 광학 전문 기업들과의 치열한 경쟁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모두 안경 렌즈라는 극히 제한된 공간 속에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빛을 전달할 것인가를 두고 다투는 경쟁자들이다. 비유하자면 아주 좁고 복잡한 미로 같은 통로를 통해 최대한 많은 빛의 입자를 손실 없이 정확하게 눈동자까지 배달하는 최적의 경로 설계 전쟁을 벌이는 셈이다. 레틴에이알은 이미 확보한 양산 데이터와 독자적인 광학 설계를 무기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과 차세대 AI 글래스 연구개발(R&D)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부품 하나가 안경의 전체 무게와 배터리 지속 시간을 결정짓는 하드웨어 구조에서 레틴에이알의 위치는 단순한 부품 납품사를 넘어 제품의 상용화 성패를 쥐는 핵심 전략 파트너로 진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