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와 애플의 최신 AI 칩은 TSMC가 ASML의 EUV(극자외선) 노광 장비로 회로를 그려내야만 탄생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세밀한 패턴을 찍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기술이기에, 이 장비의 흐름은 곧 고성능 반도체 패권과 직결된다. 현재 이 공급망의 핵심 고리를 두고 미국 정부와 ASML이 정면충돌했다.

미국 상무부의 EUV 유출 의혹과 수출 통제 위반 가능성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은 최근 ASML 경영진과의 회의에서 EUV 장비 한 대가 중국으로 유입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트럼프 행정부 1기부터 이어진 EUV의 중국 판매 금지 조치를 정면으로 위반한 사례가 나왔다는 주장이다. 미국은 최첨단 AI 역량이 중국의 군사 및 산업 기반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촘촘한 통제망을 가동해 왔다.

미국 행정부 고위 관계자들은 ASML이 EUV 관련 부품과 운송 장비를 중국으로 선적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보유하고 있다고 블룸버그에 밝혔다. 다만 해당 증거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단 한 대의 장비라도 유입됐다면, 미국이 설계한 첨단 반도체 봉쇄 전략에는 치명적인 균열이 생긴 셈이다.

크리스토프 푸케 ASML CEO는 중국 내에 EUV 장비가 존재한 적이 없다고 즉각 반박했다. 모든 장비의 위치를 실시간 추적하고 있으며, 현재 모든 기기는 모니터링 가능한 고객사가 사용 중이거나 이미 본사로 반환된 상태라는 설명이다. ASML은 자사 관리 체계에 결함이 없음을 강조하며 미국 정부의 주장을 사실무근으로 규정했다.

EUV 기술의 독점적 진입장벽과 ASML의 내부 방어 체계

EUV 광원 생성 기술은 ASML이 20년의 개발 기간과 천문학적인 비용을 투입해 완성한 결과물이다. 수십 년간 축적된 지식의 80%가 집약된 이 기술은 전 세계에서 ASML만 보유하고 있다. 회사는 이러한 기술적 격차 때문에 장비를 실제로 보유하지 않고서는 역설계(Reverse Engineering)를 통한 복제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푸케 CEO는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 구축한 내부 방화벽 시스템을 방어 근거로 제시했다. EUV 기술 문서와 교육 과정에 접근할 수 있는 인원을 엄격히 분리했으며, 특히 중국 상주 직원들은 설계상 접근 불가 영역에 배치했다. 인적 경로를 통한 핵심 정보 유출을 원천 차단한 구조다.

대신 ASML은 해상도가 낮은 구세대 장비인 DUV(심자외선)를 중국에 공급하며 비즈니스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최신 공정과의 세대 격차를 벌려 중국의 추격 속도를 늦추는 전략이다. ASML은 2026년 예상 매출의 약 20%가 이미 허가된 중국향 DUV 판매에서 나올 것으로 보고 있으며, 만약 EUV 금지 위반으로 라이선스를 잃게 된다면 이 막대한 매출과 기업 가치가 한꺼번에 흔들리게 된다.

미국 정부의 독점 붕괴 시도와 AI 공급망의 리스크

미국 상무부는 ASML의 독점 체제를 깨기 위해 차세대 광원 기술 스타트업 xLight에 최대 1억 5천만 달러의 세금을 투입하기로 했다. xLight는 ASML 장비와 통합 가능한 하드웨어를 개발해 파트너가 되겠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ASML의 핵심 기술을 대체하려는 미국의 전략적 움직임이다. 푸케 CEO는 xLight의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민간 자본의 움직임도 거세다. 피터 틸은 Substrate라는 스타트업을 지원하며 ASML에 도전하는 EUV 라이벌 기술 개발을 추진 중이다. 공적 자금과 민간 자본이 결합해 ASML의 독점적 지위를 해체하려는 다각적인 시도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 미국 의회는 DUV 장비의 중국 수출까지 전면 금지하는 초당적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4월 주요 위원회를 통과한 이 법안이 시행되면 ASML의 2026년 예상 매출 20%를 차지하는 중국 경로가 완전히 차단된다. 시가총액 7,000억 달러 규모의 유럽 최대 기업 ASML은 이제 단순한 장비 공급사를 넘어 미국의 안보 통제 권한에 생존이 결정되는 리스크에 놓였다. 결국 고성능 AI 칩 공급망의 안정성은 기술력이 아니라 미국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요동칠 가능성이 커졌다.